2011. 4. 9. 17:46
시즌 3라운드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그예 현실로 나타났다.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우승, 그것도 챔피언 시리즈 4:0 완승.

시즌 초, 아니 포스트시즌 시작까지만 해도 이걸 예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2라운드 끝날 때까지만 해도 삼성은 현대를 제외한 전 구단에 패하며 호구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시즌 초 배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급기야 다른 사이트에서도 애용했던 일명 '호구왔능가' 짤방. 
그 짤방에 따르면 현대를 제외한 모든 구단이 삼성에게 '호구왔능가' 드립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었다.
가빈-박철우-김정훈 이렇게 윙으로 나서는 상황에 리시브 라인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리시브는 실상 김정훈과 여오현 둘이 다 하는 상황.
처음으로 풀시즌을 소화하는 세터 유광우는 정확도도 스피드도 재치도 보이지 않는 뻔한 토스웍으로 팬들의 원성을 샀고...
연봉 3억에 FA 계약을 맺은 박철우는 시즌 내내 부진하면서 박임마 혹은 벽철우라는 오명을 둘러쓰고 살아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성은 V리그의 ㅄ오브 상ㅄ이었고 사람들은 삼성의 몰락을 즐겼다.
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선동열 감독 경질 소식이 들려오자 다음 차례는 신치용이라는 말이 넷상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다녔다.
훗날 삼성이 3라운드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승수를 쌓기 시작하며 시즌 막판 3위까지 올라오자
시즌 초부터 내내 삼성에 잡히던 현대를 향한 '이게 다 현대 때문이다'라는 원성이 나오기도 했지만...
14년을 챔프전에 진출해서 12년을 우승한 팀이 한순간 바닥으로 내려앉으면 그 충격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은데
끝까지 마음을 다잡고 시즌 막판 3위까지 치고 올라온 점과 포스트시즌 들어 더욱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연승을 이어간 점은
절대 단순히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리라 보인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고, 현실은 꼴찌일지언정 챔피언을 꿈꾸자던 삼성 선수들의 강렬한 투지와 열망이
V5라는 오늘의 결과를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디그 하나, 서브에이스 하나, 블로킹 하나 터질 때마다 유독 더욱 열광하고 화이팅을 외치던 삼성 선수들의 모습은 
'인간의 정신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말의 또하나의 사례가 되지 않을런지.

오늘 챔피언결정 4차전 경기가 있었다.
사실 경기 내용은 양 팀 다 썩 좋지 못했다.
다들 지쳐서 그런지 토스 속도나 선수들의 움직임도 다 상당히 느렸고...
양 팀 모두 경기 방식이 참 단조로웠다. 외인 선수의 오픈 공격 일변도...
배구에 관심없는 사람이 우연히 오늘 경기를 봤다면 참 재미없는 경기라고 했을 것이다.
얼추 서브 받아서 다른 선수가 언더토스로 느릿느릿 올려놓으면 외국인 주포가 공 날아오는 걸 보고 점프해서 때리는 장면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항공도 에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었는데...
...근데 삼성은 더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오늘 가빈의 공격 점유율은 무려 79%에 달했다. 나홀로 공격 시도 88개.
그 다음으로 공격시도가 많았던 선수가 신으뜸인데 고작 7개.
마냥 기분좋게 경기를 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3차전이 끝나고 정말 기분좋게 놀다 잠들 수 있었던 이유는 신으뜸과 김정훈의 깨알같은 공격, 그리고 센터들의 활약이었는데
오늘은 그 모습이 아예 실종되어 버려서 참 심란했다.
경기를 보며 짜릿했던 장면이라곤 고희진의 6블로킹 정도밖에 없었으니...
오늘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자 했던 삼성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경기는 아무리 큰 스코어차로 이긴다 하더라도 삼성팬들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경기 내내 리시브가 너무 불안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이해하기엔 그래도 이건 너무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겪어온(!) 우승들 가운데 오늘의 우승이 가장 감동이 덜한 게 사실이다.
올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이번 시즌만큼 드라마틱한 우승이 없는데...
이건 그냥 그야말로 리시브-토스-가빈 이게 전부였으니.
경기 내용이 좀 더 다이나믹하고 다양했어도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보다 200%는 더 짜릿하고 감동적이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쉽다.

내가 꿈꾸었던 삼성의 우승 장면은...
가빈은 꾸준히 자기 역할을 해 주는 가운데
잊을 만할 때마다 신으뜸의 벼락같은 퀵오픈과 김정훈의 시간차, 고희진-조승목의 미칠듯한 속공 퍼레이드가 정신없이 이어지며
경기 후반부쯤 박철우가 간간이 조커로 나와 잘나갈 때 특유의 빠른 라이트 공격을 잇따라 꽂아대며 부활을 알리고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신감이 코트로 우르르 뛰어나와 박철우를 번쩍 안아드는 그런 광경이었는데
(.........에???;;;)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저 꿈의 반 정도만이라도 이루어졌으면 지금의 심란한 기분은 좀 덜했을 것이다.
다른 삼성팬들도 좀 더 마음 편히 우승의 기쁨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3차전이 끝난 직후, 배갤에 삼빠들의 자축글이 올라올 새도 없이 '몰빵배구 성토설'이 쏟아지자
한 삼성팬이 야속한(?!) 넷상 분위기에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었다.
"성토글들 올라오는 통에 경기 끝난 후 단 10초도 제대로 즐거워하지 못했다. 이긴 팀 팬이 왜 맘껏 승리를 즐기지도 못하나?"
이기는 것도 중하지만 이기는 팀 팬들이 감수(?)해야 할 이런 마음고생도 생각해서
다음부터는 너무 이렇게 극단적으로 흐르는 플레이는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러고보니 지난날 안젤코의 공격 점유율이 50% 가까이만 되어도 난리가 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60% 찍는 건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 되어 버렸으니...
이건 삼성도 책임감을 느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외배구에 밝은 사람들이 주야장천 외치는 스피드배구 도입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이렇게 단 한 명에게 모든 공격책임이 전가되다시피 하는 극단적인 공격 분포는 자칫 큰 화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빈의 공격 성공율이 50% 아래로 내려가면 삼성이 이기기 어렵다'는 다른 팀 감독들의 분석을 기억한다.
다르게 해석해 보면 가빈이 부진한 날의 삼성은 꼼짝없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올 시즌은 끝났고, 가빈이 다음 시즌에도 삼성에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새로 올 외국인 선수가 이 정도의 고강도 공격 부담을 시즌 내내 감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도 없다.

재테크 책을 보면 늘상 나오는 말이 '계란을 한 접시에 담지 말라'이다.
공격을 한 명의 선수에게만 전가하지 말라. 그 선수가 부진하면 그땐 어쩔 것인가? 그 부진이 계속 길어지면?
다음 시즌의 삼성에게 천 번 만 번 읍소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분배 좀 하자.
다른 국내 공격수들의 공격력을 믿을 수 없어 그런 거라면 그들 개개인의 공격력을 배가시킬 방법을 찾아서 적용시키자.
빠른 배구를 하든 쳐내기 본좌가 되든 매일 훈련시간에 막장토스 코트에 내리꽂기 100회를 실시하든 뭐라도 해 보자.
진심 걱정돼서 그렇다.

항공은 정규리그 당시 보여 주었던 위용을 이번 챔피언시리즈에서 전혀 보여주질 못했다.
사실 정규리그 시절 하던 것의 반만 보여 줬어도 이렇게 4:0 스윕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항공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하면 최부식을 중심으로 한 준수한 수비와 한선수의 토스에 이은 국내 윙 공격수들의 고른 활약인데
이번 시리즈에서 김학민이 부진한 탓도 있고 한선수의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점이 크기도 했지만
챔피언 시리즈에서의 항공은 정규리그에서 줄곧 1위를 달릴 때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서브의 경우 에반은 여전히 좋았지만 예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위력이 약해진 인상이었고,
블로킹 역시 삼성에 비해 딱히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챔프전에 처음으로 올라온 팀의 한계였던 걸까.
갈수록 무서울 정도의 파이팅을 뿜어내는 삼성에 비해 항공은 왠지 약간 기가 죽어 있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선 허망하게 끝난 이번 챔프전이었지만,
그래도 큰 무대에 한 번 올라왔으니 다음에 올라와 본 챔프전은 예전만큼 크고 무서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전 선수들이 대거 군 문제에 걸려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항공 선수들의 발걸음이 더 무거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 이렇게 챔피언결정 4차전을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10-11 V리그는 막을 내렸다.
농구에서 우승팀 선수들이 가위로 림의 그물을 자르는 것처럼
챔피언 모자를 쓴 고주장과 신감이 네트 양쪽 끝에서 네트와 지주를 연결하고 있던 줄을 잘라 네트를 내리는 모습을 보니
이제 정말 이번 시즌(남배)이 끝났구나 실감이 든다.

매년 오고 가는 시즌.
그 속에서 나도 나이를 먹고 선수들도 나이를 먹고 감독님들은 늙어 가고(응?)
그렇게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간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지면 시즌은 다시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배구의 계절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끝없이 이어서 찾아오듯이.
한층 더 달라지고 성숙해 있을 7개 팀을 기대하며,

2010-11 V리그 종료.

& The Volleyball Must G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