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6. 23:27

세터의 조건?

Volleyball/other 2010. 1. 16. 23:27

배구를 일컬어 흔히 세터놀음이라 한다.
그만큼 세터는 배구에서 절대적인 존재다.
다이렉트 킬이나 2단공격, 혹은 다른 공격수가 2단연결로 올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정상적인 배구의 공격은 반드시 세터의 손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세터는 공격수에게 안전하게 볼을 배달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의 공격을 할지 결정하고, 공격수에게 따라붙는 블로커를 따돌리는 역할도 해야 한다.
여기에 수비와 블로킹, 서브, 때로는 2단 공격도 하게 된다.
남다른 배구 센스가 필요한 포지션이기도 한 듯하다.

세터란 포지션이 배구가 처음 생긴 그 순간부터 있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세터의 기원에 대해 내 멋대로 생각해 보자면...

처음에는 중구난방으로 아무나 아무에게 2단 연결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전문적으로 2단 연결을 맡아 공격수들의 타점을 맞춰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유리하겠다는 판단을 누군가가 하게 되고
전문적으로 2단 연결만 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게 하나의 포지션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이 점점 정교해지면서
속공 토스도 생겨나고, C속공 토스도 생겨나고, 백어택 토스도 생겨나고, 시간차 토스도 생겨나고...

그렇게 배구에서 세터의 중요성이 커져 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한국배구에 세터같은 세터가 없다는 푸념이 많다.
그럼 좋은 세터란 무엇일까?

다른 건 다 제치고, 오직 토스만 가지고 좋은 세터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니
세터의 토스를 평가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항목이 있는 것 같다.

1. 구질
2. 볼배분
3. 스피드

이 중에 요즘 V리그의 세터들이 가장 지적당하는 게 2번과 3번 사항이다.
흔히 몰빵과 느려터진 굼벵이 토스로 표현되는....
나도 몰빵과 굼벵이 토스에는 호의적이지 않다.
대책없는 몰빵은 결국 팀에 치명적인 해악이 되어 돌아온다. 이건 내가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껴 봐서 안다.
레안드로가 있던 시절의 삼성과, 최근 3라운드 들어 가빈에게 대부분의 공격이 올라가고 있는 지금의 삼성을 보면 
저러다 막히지 싶은 생각에 조마조마하고 불안하다.
빠른 토스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찬성하는 바다.
조금이라도 빠른 게 상대의 방어막을 뚫는 데 보다 유리하고,
뻔히 보이는 공격으로는 벽치기밖에 못 하니까.

하지만 사실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1번 사항이다.
물론 2번과 3번 사항 역시 중요하다.
이 세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따지는 것은 어쩌면 정말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1번을 가장 중시한다고 말한 이유는 이거다.
공격수가 가장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은 역시 자기 타점에서 정점을 잡아 강타를 꽂을 수 있는 그 순간이다.
세터는 공격수에게 자신의 타점과 타이밍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을 내리칠 수 있게 해 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토스한 공이 네트에 붙고 떨어지고 높고 낮고 때로는 너무 빠르고 때로는 너무 느리고
이렇게 불안정하다면 공격수는 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
아무리 블로커를 피해 총알처럼 토스를 뽑아 준다고 해도 그 공이 너무 불안정해서
공격수가 제대로 때리지도 못하고 억지로 밀어넣거나, 연타로 겨우 넘기거나, 심지어 몸개그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건 절대 잘 한 토스라고 할 수 없다.

(블라도와는 별개의 얘기다. 블라도의 경우는 토스가 빠르면서도 구질이 좋았다. 빠른 토스를 못 받는 우캐 공격수가 문제였지.
여기서의 나쁜 토스란 높이나 네트와의 거리, 길이 등이 일정치 못하고 들쑥날쑥한 토스를 말한다)

그래서 나는 세터를 평가하는 제1의 기준이 구질이 되어야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얼마 전에 기록지 드립 할 때도 비슷한 취지의 문장을 몇 줄 썼었다.
공격수가 공격 성공하면 무조건 세트 정확으로 표시되는 지금의 세트 기록을 구질로 평가하는 걸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볼배분과 스피드를 소홀히 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느낌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어떤 때는 위의 두 가지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가장 기본적인 구질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얘기다.

결론은, 세터라는 자리는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자리인 것 같다는 거다.

PS.
세터의 경기 운영에 대해 짧게 뱀발을 달자면...
인위적으로 볼 점유율을 나누려 한다거나 화려한 세트플레이를 선보이겠다는 욕심을 내세운다거나
이 공격만은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오기를 내세우기보다
경기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면서 순간순간 양쪽 코트의 움직임을 읽고 물 흐르듯 토스하는 게
가장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예전에도 다른 분과 나눈 이야기인데..
경기 운영에 있어서 세터의 가장 좋은 덕목은 경기를 읽는 시야를 항상 넓게 가져가는 것,
상대 블로커와 수비수의 움직임, 그리고 우리 코트에서 누가, 어떤 공격이 가능한 상태인지를 파악하고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
이라고 생각을 해 봤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사실은 참 쉽지 않은 얘기다.

...어쩌면 좋은 세터가 되려면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 게 최선일지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