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1. 01:30
요새 나는 그야말로 '배구를 글로 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경기도 제대로 안 챙겨 보고 나중에 기록지 나오면 그냥 그것만 보는 수준.
예전엔 열심히 챙겨봤는데 이젠 그럴 맘도 나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배구에 열정이 식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실망과 체념이 겹치고 쌓이면 결국 이런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나는 삼성의 경기를 잘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기든 지든 크게 신경도 안 쓴다. 전엔 이렇지 않았었는데...
오늘 기록지 보고 졌다는 사실에 분통터지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보다 되레 쌤통이란 생각이 들 정도면 이건 말 다 한 거다.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팀내에 공격수가 없어서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박철우의 기복이 쩔어서 가빈밖에 믿을 넘이 없다고?
가빈 몰빵이 멤버십의 조... 좋은 표본이라는 신감독의 발언을 접했을 때부터 뜨악한 기분이 없진 않았었지만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그 생각을 실천할 줄은 몰랐다.
대체 가빈의 공격 점유율이 50% 아래로 내려가는 걸 본 역사가 없다.
아무리 현대캐피탈 리시브 라인이 안습이라지만 박철우가 서브에이스를 4개 기록할 정도면 박철우도 오늘은 나름 긁히는 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퀵오픈 성공율이 저조하긴 했지만(30%대) 백어택 성공율은 좋던데 가빈에게 갈 백어택 하나 박철우에게 몇 개만 더 주었으면 어땠을까.
문성민의 서브가 어느 정도 강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점을 고려해 봐도 센터 공격 참여율은 여전히 턱없이 낮다.
어차피 레프트 한 자리 공격 버리고 게임하는데... 센터라도 뒷받침을 해 줘야 공격 루트가 다양화될 거 아닌가.
외국인 공격수 한 명의 파워에 전적으로 기대는 게 승수 쌓기 가장 쉽다는 거 모르는 건 아니다.
제일 쉽기도 하겠지. 세세한 공격 전술 따위... 어차피 피지컬로 내리누르면 그만인데, 그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상대 코트 초토화가 가능한데
뭐하러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겠음. 내가 감독이라도 그렇게 할 것 같긴 함. 쉬우니까.
하지만 그럼 체력 안배라도 해 주든가. 그래야 그 잘난 피지컬 현상유지라도 할 거 아니야!
솔직히 이젠 안 봐도 눈에 훤히 보인다. 리시브가 잘 되어도 가빈, 안 되어도 가빈, 좌 가빈 우 가빈 후위 가빈 보나마나 오픈 가빈 백어택 가빈. 
근데 그래서 상대를 압도하긴 했나?
오늘 진 건 어찌 설명할 건데?
공격력보다 수비, 결정력보다 리시브.
생각해 보면 신감독은 항상 그랬다. 이도저도 아닌 김정훈은 예외로 치더라도 공수 양면에서 다 괜찮은 홍정표를 전면 기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와 숱한 부상으로 공격력을 거의 상실한 석진욱을 항상 가빈 대각에 기용한다는 것은
리시브를 극대화하는 대신 공격 루트 한 자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명의 공격수와 두 명의 리베로 체제를 경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수비가 아주 쩌냐 하면 이젠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반격. 반격 이거 어쩔 텐가? 박철우 안 터지고 가빈 부진하면 그 다음엔 뭐 어쩔 건데?
(언제나 기본 이상은 해 준다는 가빈이지만 가빈도 결국은 사람이다. 인조인간 로보트가 아닌데 어느 순간 갑자기 퍼질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리고 가빈도 나이를 먹어간다. 언제까지나 팔팔한 24세가 아니란 말이다)
드림식스의 신영석이나 현건의 양효진처럼 중앙에 쩔어주는 득점 루트라도 하나 끼고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근데 사실 있다고 해도 안 쓸 것 같다)
공격력이 없어 줄창 수비만 하면서 센터 소사에만 기대다가 결국 우리에게 한 세트도 못 건진 FIVB 월드그랑프리 당시 아르헨티나 여배 국대와 대체 뭐가 다른가?

물론 현대캐피탈도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삼성과 똑같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여기도 공격하는 거 보면 삼성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다만 수니아스의 공격 비중이 가빈보다는 그나마 좀 낮다는 것과 문성민이 어느 정도 큰 공격을 분담해 줬다는 것
그리고 레프트 장영기의 공격 참여도가 그럭저럭 보장은 되었다는 것 정도. 

이번 시즌, 난 진심으로 외국인 몰빵 안 하는 팀들이 챔프전에 올라갔으면 좋겠다.
삼성은 어찌되든 이제 상관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의미없는 내용의 경기를 할 것 같으면 이미 승패가 무슨 소용인가.
끝내 센터 루트를 살릴 수 없다면 그나마 레프트 두 자리가 모두 공격을 할 수 있는 팀들이 플옵도 통과하고 챔프전에도 올라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나마 배구 보는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난 실내에서 하는 비치발리볼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다양한 전술이 난무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배구를 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