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 16:44
미칠듯한 디그전으로 기억될 이 경기.
결국 이 두 팀의 승패를 가른 것은 서브 대처 능력과 공격 루트였다.

이제 오늘 경기를 마지막으로 3라운드가 모두 끝나고 1주일간 올스타 브레이크라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두 팀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이 경기에 쏟아붓는 인상을 주었다.
양팀 모두 어느 때보다 육체적, 정신적 체력 소모가 엄청나 보였다. 그만큼 말 그대로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운 것.
스피드배구 못한다고 사람들이 늘상 까는데, 오늘 두 팀이 보여준 배구도 정석적인 스피드배구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토스에서 공격으로 이어지는 타이밍이 예전보단 꽤 빨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상대의 블로킹을 더 제쳐 보겠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크게 인상에 남았던 것은 역시 두 팀의 엄청난 디그전.
그냥 떨어질 볼도 어떻게든 다 살려내는 양팀을 보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덕분에 경기 결과도 풀세트 접전에 5세트는 두 번이나 듀스를 겪었다.

(클릭하면 원래 크기로 보실 수 있음)

치열했던 두 팀의 승패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공격 방식이 아닐까 한다.
삼성은 가빈-박철우 쌍포를 내세웠고 항공은 마틴을 중심으로 김학민, 곽승석, 그리고 센터들이 지원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맞섰다.
이 경기에서 결국 항공이 이길 수밖에 없었고 삼성이 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공격 운용 방식이었다.
삼성은... 가빈은 늘 꾸준히 해 주고 있고 오늘은 특히 박철우가 정말 잘 해줬다.
오늘따라 가빈이 범실도 많고 불안정한 장면을 자주 보였는데 그 불안한 틈을 박철우가 정말 잘 메워 줬으니까.
박철우가 공격에서 이렇게 잘 통하는 모습을 얼마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삼성 선수는 아이를 가져야 비로소 버프가 생기나 보다
하지만 삼성의 큰 문제는 이 다음의 공격 옵션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시간차 몇 개 하는 것 빼고는 사실상 보조 리베로나 다름없는 석진욱을 제3 공격 옵션으로 쓰는 것도 무리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공격력이 좀 나은 홍정표를 적극 기용하는 것도 아니고
센터들은 가뭄에 콩 나듯 속공 몇 개 겨우 하고는 그 외에는 병풍이나 다름이 없다.
꾸준히 속공을 하고 김학민의 중앙후위공격을 적극 활용하는 한선수의 항공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난 김학민이 노블럭으로 중앙후위 뻥뻥 때려낼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삼성에서는 가빈이나 박철우가 중앙후위를 가끔 한다지만 걔네야 원래 득점원이고.......
좀 다른 선수들이 이 두 주포를 도와 큰 공격을 같이 수행해 줄 수는 없는 것인가??

강서브에 대한 대처에서도 두 팀의 희비가 엇갈렸다.
삼성은 서브가 흔들리면 전적으로 거의 가빈 오픈으로 올라간다. 3인 블로킹의 견제는 숙명처럼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포인트를 내는 가빈이 참 대단할 따름이다.
그러나 가빈도 결국은 인간.
4세트 이후 연속 공격범실을 범하며 급속도로 흔들리던 가빈의 모습은 그가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 신이나 로봇은 아니라는 것을 잘 입증한다.
마틴도 공격 참여도와 강도에서 엄청난 면모를 보였지만
다른 공격수들의 지원사격이 없었다면 마틴 역시 후반 들어 급속히 흔들리다 연속범실로 자멸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마틴은 4세트 후반 좀 후달리는 모습을 보이며 벤치로 교체되기도 했다)

오늘 박철우의 양가 가족들이 총출동했던데 이기지 못했으니 박철우 심정이 좀 좋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훌륭했으니 박철우는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해 벽두를 여는 첫 경기답게 양팀 다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올리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관객으로서 배구 구경은 아주 잘했다.
적어도 재미없거나 의미없거나 감흥없는 경기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니 양팀 선수들 모두 오늘 경기 내용에 충분히 뿌듯해해도 된다.
다만 부족한 점에 대해선 다시금 진지하게 복기하고 개선해 주길.

내가 삼성에 요구하는 것은 별 거 없다.
이게 사실은 늘 하는 말인데...
가빈과 박철우만이 공격수가 아니다.
5세트 들어서는 아예 박철우를 빼 버리고 가빈에게 공격을 올인하려고까지 하던데,
이런 건 내가 정말 싫어하는 거다.
왜 멀쩡한 공격수들을 다 리베로로 만들려고 하는가?
오늘 항공 하는 걸 봤지 않나.
배구 코트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역시 공격을 강화하는 것이다.
센터와 보조 레프트(?)의 공격 참여도를 제발 올려라.
김상우 해설이 경기 도중 2세트의 한선수를 보고 '억지로 배분하다가 승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삼성은 솔직히 배분을 안 해도 너무 안 하니 문제인 거다.
그러니 쉽게 이길 경기도 자꾸 어렵게 가게 되는 거다.

배구는 스파이크로 득점하는 경기다.
서브리시브와 디그로 득점하는 경기가 아니다.